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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부록 : 김이설 작가 필사노트)(소설, 향)(양장본...

김이설 지음작가정신

12,000원

책 소개
중력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작은 싹,
고단한 시절의 복판을 통과 중인 우리들이 써 내려가는
가장 보통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

하루의 일과란 매일이 똑같았지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다른 것들이란 주로 아이들에 관한 것들이었고, 같은 건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몇 년째 오로지 필사만 하는 중이었다._본문 55쪽

‘나’는 낡고 오래된 목련빌라에서 일흔이 다 되어가도록 평생 기운이 없는 사람이었던 아버지와, 무기력한 가장을 대신해 집안의 모든 결정을 도맡아온 어머니, 남편의 폭력을 피해 세 살과 갓 백일 지난 아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 동생과 함께 살아간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똑똑하고 야무져 늘 전교 상위권을 유지하는 동생과는 달리 한 번도 무언가가 되고 싶다거나 애써 노력을 기울여본 적이 없던 나는 어느 날 자신이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일반적인 삶의 방식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시’를 쓰고 싶다는 것. 그러나 현재의 나는 동생이 다시 집으로 들어온 3년 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낮밤으로 회계 사무와 학원 강사 일을 병행하는 동생을 대신해 육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나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았던 것이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_본문 42~43쪽

식구들이 졸지에 아이 둘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아버지는 물론 엄마마저 다시 일을 시작했고, 나는 자연스레 집에 머무는 사람, 즉 집안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된다. 그것은 나 스스로가 자처한 족쇄이기도 했다. 뒤늦게라도 대학에 가라고 학자금 대출까지 책임져준 동생이었다. 게다가 가족은 공동희생 구조가 아닌가. 희생의 경중은 엔분의 일로 정확히 나눌 일이 아니었다. 이들 여섯 가족은, 여섯 살 네 살 아이들마저도 각자가 짊어진 생의 무게로 숨을 허덕이기에 바빴다.

며칠째 읽고 있는 시집과 필사 노트,
흰 종이와 잘 깎은 연필 한 자루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집안일을 했지만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_37~38쪽

‘오늘은 쓸 수 있을까.’ 그러나 나의 눈앞에는 ‘끔찍하게 지루한’ 일의 반복만이 놓여 있다. 나의 다짐은 아이들 물건이 널브러진 거실, 부엌에 쌓여 있는 설거지, 김치용 열무 세 단,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가지와 오줌 싼 이불로 수북한 하루치의 빨래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가족들의 행복과 안위를 위한, 의미 없는 희생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자신이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치민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8년을 만나온 연인과도 이별한 참이었다. 나는 살면서 주인공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제야 어쩌면 자신과 잘 어울리는 상황에 놓인 것 같다며 자조하지만, 자신의 노력이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가슴 깊숙이 어딘가가 뻐근한 기분이 들었다.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 밤에 아픈 이가 또 있는 모양이었다._142쪽

가족이라서, 또는 가족이기에 더한 상처와 폭력을 휘두르는 현실을 견디기 위해 화자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시를 필사하는 것. 그마저도 녹록지 않은 밤들이 더 많았지만 나만의 언어를 찾겠다는, 그러지 않으면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다는 절박함과 절실함으로 화자는 필사 노트를 펼쳐 시집의 한 페이지를 한 글 한 글자 베껴 써 내려간다.

몇 번의 봄을,
몇 번의 여름과 가을과
몇 번의 겨울을 보낸 뒤……
눅진하고 습한 밤의 시간들을 지나온,
마땅히 눈부실 너와 나의 계절들

네 인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저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터널은 결국 끝이 있고, 그 끝은 환하다고._78쪽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대는 재난문자 경보, 온 세상을 잡아먹은 것처럼 이어지는 미세먼지의 나날들. 그 속에서 여섯 식구가 창문도 열지 못한 채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집은 나로 하여금 마치 사방이 막힌 상자, 때로는 육중한 관 속에 갇힌 기분이 들게 한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두고 이른바 ‘K장녀(Korea+장녀)에 대한 서사’라고 말한 바 있다. 시인 지망생인 ‘나’는 40대 비혼 여성이고 장녀로, 여동생의 이혼으로 곤궁에 처한 집안을 위해 조카들의 ‘돌봄노동’을 맡는다. 그리고 각종 집안일에 시달리며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은 조금도 주어지지 않는다. ‘조용히, 쓸쓸히, 오롯이, 가만히, 차분하게’ 같은 단어들을 누릴 수 없는 일상, 시를 필사하는 일조차 건너뛰는 날들. 그러나 가사노동의 무미함과 고단함보다도 나를 더욱 좌절케 하는 건, ‘나’의 노력과 수고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의미조차 없는 일, 능력이 없어 스스로 주저앉고 떠맡은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하기 싫은 일’로 치부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화자의 상황에 처한다면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생의 끈질긴 얼룩과 여름 소나기에 대해서, 그 소나기 끝에 피어오르는 흰 구름에 대해서. 나는 지금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해서._본문 171~173쪽

소설에서는 남의 시를 베껴 쓰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좁아터진 목련빌라의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만의 시를 쓰기로 용기를 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정밀한 소묘화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하고 되뇌던 눅진하고 습한 밤의 시간들이 ‘오늘은 그래서 쓰고 싶었다’라고 발화하며 자신에게 몰입하는 충만한 하루로 이어지기까지, 이번의 정류장이 다음 승차의 어느 목적지를 향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한동안은 계속되기를 바라본다. 나는 잠시만이라도,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을 되찾은 것이다.
저자소개
김이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열세 살」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오늘처럼 고요히』, 경장편소설 『나쁜 피』 『환영』 『선화』 등이 있다.
목차
우리의 정류장 7
목련빌라 17
필사의 밤 53
치우친 슬픔이 고개를 들면 95
여름 그림자 123
시인의 밤 153

우리의 문장을 싣고 달리자 -구병모 175
작가의 말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