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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윤난지 지음한길사

648p38,000원

책 소개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과 주변을 아우르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 현대미술을 연구하며 깨달은 ‘단순한 사실’을 밝힌다. “미술은 미술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현대미술 또한 한국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그 정체(identity)를 말하는 언어”다.
정체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경계 안에 다양한 양식이 교차하고 충돌하며 그 경계 자체를 허무는 과정 자체가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는 그 정체를 정의하지 않는다. 정체는 매우 다양하고 유동적이라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고 그렇기에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종의 ‘열린 질문’이고, 저자가 데리다의 ‘차연’(defferance) 개념을 인용한 이유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찾기 ① : 한국의 현대사
이러한 정체 찾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한국의 현대사 자체다.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식 외에도 사회적 요소가 한국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가령 저자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을 차지한 단색화가 유신체제의 대응물이라고 설명한다.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창안된 단색화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지향한 유신체제의 예술적 대응물이다. 전통미술과 그 예술관이 현대미술 및 그 이론과 만나는 단색화는 ‘한국적’이면서도 ‘모던한’ 미술이 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당대가 요구한 [근대성을 담보한] 민족주의의 적절한 기호가 될 수 있었다.” _ 212쪽

이처럼 한국 내부의 정치적 사정은 물론이고 좀더 본질적인 차원에서도 한국 현대미술은 현대사의 산물이다. 일제강점기와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늘 ‘하위’의 자리에 머문 한국의 현대사는 “아버지 타자, 즉 본받아야 할,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의 타자”를 좇은 기록이다. 이러한 양상은 한국 현대미술에도 반영되는데 흥미롭게도 모방이 아닌 창조의 성격을 띤다.

“타자를 전용과 개발의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 모더니즘과도 다르고, 서구를 올려다보는 동시에 아시아 국가들은 내려다보면서 자국의 정체를 저울질하던 일본의 현대미술과도 다른 현대미술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다름’이 곧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일 것이다.” _ 15쪽

대표적인 것이 앵포르멜(Informel)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신·구체제의 격돌장이 된 한국 사회의 각 부문에서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반(反)체제 의식이 표면화된다. 미술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종의 관전(官展)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에 대한 저항의지가 분출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한국판 앵포르멜이다.
단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앵포르멜은 프랑스가 원산지다. 해방 후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수용한 모더니즘으로 지금까지 ‘외래경향의 맹목적 추종’으로 비판받았으나 저자는 여기서 “문화수용의 능동성”을 새롭게 찾아낸다.

“이러한 문화수용은 당대 한국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에서 기인한 특수한 요구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따라서 매우 선별적이고 자의적인 측면이 발견된다.
수용의 시기와 대상에 따라 외래경향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선별적인 태도는 수용 주체의 능동성을 드러내는 국면인데, 각 경향에 대한 반응에서도 매우 자의적인 해석이 작용했다. ……다다(Dada)를 계승한 그리고 앵포르멜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사실주의가 우리 앵포르멜 속에서는 무리 없이 혼용된 것도 이런 맥락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_ 192~193쪽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찾기 ② : 주변부 미술
둘째는 한국 현대미술의 경계를 뒤흔드는 주변부다.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은 이우환, 박서보 등으로 대표되는 단색화와 그 근간을 이루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차지해왔다. 하지만 역동적이고 혼성적인 한국 현대사만큼이나 한국 현대미술 내에도 다양한 양식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한 주변부는 한국 현대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영역을 확장시킨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가 주변부를 강조하는 이유다.
저자는 특히 여성 미술에 주목한다. 여성 작가들은 당대 사회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면서 나름의 시각기호를 만들어왔다. 중심 특유의 ‘일관성’의 미학에서 자유로운 그들은 “아직 안 된 것으로서의 여성”(woman as the not-yet)의 존재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이 부분에 주목한다. ‘아직 안 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또한 스스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근현대를 통틀어 여성 미술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 있다면 주류를 따르는 ‘일관성’의 미학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 즉 주류와 주변을 오가는 시각기호들이 교차한다는 점일 것이다. 모든 작가가 주류양식을 따랐던 모더니즘 시기에도 여성들의 작품에서는 장식적 패턴이나 공예기법 같은 주변적 요소가 공존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이후에는 그런 요소들이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페미니즘 전략으로까지 이용되어왔다.” _ 505쪽

현대미술의 중심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여성 미술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가 바로 윤석남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활동을 “여성으로서 겪는 콤플렉스를 예술을 통해 승화시키는 일종의 굿”으로 표현한다. 단순히 여성성을 증명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여성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승화시키는 것이다.

“주류와는 ‘또 다른 미학’을 제안하고 실천해온 과정이 예술가 윤석남이 걸어온 길인데, 이는 무엇보다도 여성으로 살아온 삶의 경험에서 온 것이며 그 경험의 줄기는 모성이다. 자신의 삶 속에 살아 있는 어머니, 즉 제도로서의 모성이 아닌 이른바 ‘체험으로서의 모성’에서 윤석남은 치유의 힘을 발견한다. ……윤석남에게 모성은 타자를 아우르는 주체 혹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주체, 나아가 스스로의 타자됨을 자청하는 주체 개념을 회복하게 하는 출발점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성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에게 그 존재의 윤리적 차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가장 큰 덕목일 것이다.” _ 558쪽

정체 찾기의 윤리적 차원

역동적인 상호관계로 한국 현대미술을 구성해온 중심과 주변을 탐색한 후 저자는 가장 최신의 ‘증후’를 소개하며 책을 마친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특징으로 ‘가소성’(plasticity)을 꼽는다. “의미가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기의에서 분리된 채 떠도는 기표들 사이에서 형성된다”는 뜻의 가소성은 한국 현대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는 대표적인 작가로 최정화를 소개한다. 최정화는 ‘플라스틱 예술가’다. 우선 플라스틱을 이용해 작품을 만든다. 왜 하필 플라스틱인가. 플라스틱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으며 무한한 자기복제가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후기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상품’이기도 하다. 인공이 자연을 대체한 자본주의 스펙터클에 이보다 적합한 재료는 없다. 결국 플라스틱은 ‘물질적 실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무한한 변형이라는 개념 그 자체”다.
그렇다면 최정화는 이런 플라스틱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소재를 이용해 ‘실체의 부재’라는 자본주의의 역설을 표면화한다. 동시에 이를 한국이라는 특수 상황에 적용한다. 대표적인 게 플라스틱 소쿠리를 이용한 설치미술이다.

“예전에는 수공으로 만들어졌던 소쿠리가 기계로 대량생산되어 유통되는 현실을 환기하는 이 작품들은 토착문화가 버무려진 소위 한국식 자본주의, 특히 그 혼성성이 두드러지는 한국식 후기자본주의의 시각적 표상인 셈이다.” _ 577쪽

무엇보다 최정화는 본인 스스로를 플라스틱한 것으로 표상한다. 자기 몸에 플라스틱을 붙이는 따위의 1차원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플라스틱한 것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여행자’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플라스틱한 ‘최정화 스타일’을 암시한다.

“최정화에게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에게 또 다른 의미가 부기되는 열린 과정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 주체의 끊임없는 탈중심화 과정이다. ……따라서 최정화는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리고 그의 한국성은 하나가 아닌 한국성, 유동적이고 혼종적인 한국성, 즉 플라스틱 한국성이다.” _ 603쪽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는 현대미술의 외부 요소와 내부 요소를 모두 아우르며 그 정체를 탐색한다. 그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경계’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 내부와 내부의 경계. 이 ‘제3의 공간’에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이상화해 형상화한 우리 모습이 아닌 우리도 알지 못하는 또는 우리가 밀쳐낸 타자의 모습이다. 이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중심주의 또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국가중심주의가 내포한 폭력의 가능성을 넘어서서 남과 더불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일이며, 남의 존재를 두려워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여유와 배려”다. 저자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정체 찾기가 윤리적 차원을 내포하는 이유다.
저자소개
윤난지
1953년에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와 동대학원 사회학과,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을 거쳐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미술사학회, 서양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회 회장 및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장을 맡았고,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석주미술상 (2000, 평론 부문), 석남미술이론상(2007)을 받았다.
목차
책머리에 9

1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아우르는 글 13

‘현대성’으로부터
2 동양주의와 옥시덴탈리즘 사이│김환기의 전반기 그림 47
3 근원적인 세계를 향한 이상주의│권진규의 먼 시선 89
4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또 다른’ 의미 135

‘한국적’ 현대미술을 향하여
5 단색화의 다색 맥락│젠더의 창으로 접근하기 203
6 단색화운동의 경쟁구도│박서보와 이우환 255
7 한국 극사실화의 ‘사실성’ 297

‘현대성’을 넘어서
8 김구림의 ‘해체’ 349
9 혼성공간으로서의 민중미술 399
10 한국 현대미술과 여성 457
11 윤석남의 ‘또 다른’ 미학 507
12 최정화의 플라스틱 기호학 561

참고문헌 609
찾아보기 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