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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경제학

스티븐 S. 코언,J. 브래드퍼드 들롱 지음정시몬 옮김부키

264p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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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성공적인 경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온 나라를 뒤흔든 정치적 스캔들이 정리되면서 다시 우리는 경제를 고민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다른 쪽에서는 규제 완화와 노동 유연화를 외친다.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도, 유럽의 선진국들도, 심지어 미국도 장기간의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과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경제 이론과 정책을 주도한 기존의 주류 경제학이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금융 위기를 예측하지도 못했을뿐더러 그 해결 과정에도 80년 전 케인스의 이론이 다시 쓰인 상황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경제 문제를 풀 방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인류가 오랫동안 의지해왔던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돌아보는 것, 즉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지금껏 우리가 잊고 있던 사실들을 되새기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경제사를 연구한 저명한 학자이자 실제로 경제 정책에도 관여해 본 경험이 있는 스티븐 S. 코언과 J. 브래드퍼드 들롱은 미국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조명한다. 역사의 교훈을 짧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전하기 위해, 지난 200년 사이에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성공적인 경제를 일군 나라에 집중한 것이다.

작은 정부와 자유시장의 신화 깨기
역사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여러 편견을 가진 상태로는 잘못된 길을 끊임없이 답습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실제의 역사를 보여주며 많은 이들이 가진 편견을 깨나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컨대 미국은 건국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 시장을 추구해 온 나라였으며, 그것이 미국을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올려놓은 힘이었다는 신화가 있다. 이 신화는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들에게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건국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율적 시장에 나라의 미래를 맡긴 적이 없었다.
물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매디슨 같은 사람들은 작은 정부, 자영농, 작은 기업, 자유 무역을 골자로 하는 경제 체제를 주장하기는 했다. 만약 미국이 이 길을 갔더라면 지금은 농산물과 원자재를 수출하는 오스트레일리아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 pp.43~53)

미국은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제퍼슨과는 달리 중앙집권적인 연방 정부를 중심으로 무역과 금융을 통제하여 아직은 걸음마 단계인 제조업을 보호, 육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재무장관으로 지내면서 이를 차근차근 실천했다. 관세는 높게 유지되었으며, 철도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에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와 금융도 통제했다. 자본과 인적 자원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해밀턴의 경제 재설계는 너무나 성공적이었던 터라 제퍼슨을 따르는 정치 세력이 집권했을 때조차 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정부가 경제의 방향을 계획하고 시장을 개척하여 성공적으로 경제 강국의 반열에 오른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 pp.56~59)

미국의 경제 정책은 무엇이 어떻게 달랐는가
그러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 성장에 성공하지는 않는다. 국가가 주도한 경제개발 중에는 실패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어떻게’ 경제에 개입하느냐다. 이 책이 미국에 집중해서 되도록 구체적으로 경제 발전의 양상을 살피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경제 정책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철도 건설이다. 미국의 철도는 민간 기업들이 건설했기 때문에 시장의 힘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좀 더 큰 정치적 비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미국이 점차 서부로 확장해 나가고, 개척된 땅에 농민들이 이주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운송이 큰 문제가 되었다. 자영농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을 항구로 운반해 수출하고, 주민들에게 기타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미국 전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이 반드시 필요했다. 당시 이를 가능케 할 가장 적절한 교통수단은 기차였다.
그러나 철도를 정부가 건설하기에는 예산도, 인력도 부족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철도가 놓일 구간을 조정하여 철도 사업을 진행할 업체들에게 철도 주변의 토지를 불하하고 기술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철도 사업이 가져다줄 막대한 이익을 위해 이전투구하는 수많은 사업체들의 몫이었다. 이렇게 진행된 미국의 철도 건설 과정은 당연히 국가가 일괄적으로 철도를 놓았던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속이 터질 정도로 낭비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독점과 부정부패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드넓은 미국에 철도를 놓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정부가 자원과 자본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면서 발생할 여러 이해관계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경제가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추진했고, 여러 정부가 초당적으로 그 노력을 이어갔다. 덕분에 미국 전역에 새로운 농장, 광산, 공장, 도시들이 건설되었고 철강, 석탄, 기계산업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철도 건설은 예상치 못한 효과도 가져왔다. 대표적으로 카탈로그를 통해 주문을 받고 철도를 이용해 배송해 주는 새로운 종류의 사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에 발생하게 되는 독점의 문제는 독점금지법을 통해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 pp.81~83)

경제 구조를 바꾸는 힘, 정부 투자
미국 정부가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하여 경제 성장을 자극하는 방법만 쓴 것은 아니었다.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식도 사용했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고 있는 대량생산 방식의 기초를 놓은 것도 정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량생산의 아버지는 헨리 포드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사실 최초로 대량생산의 핵심이라 할 신속성, 정확성, 균일성을 전면에 내걸고 새로운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하겠다고 외쳤던 사람은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였다. 그는 ‘호환성 부품’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기계화된 생산 시설에서 소총의 부품들을 일괄적으로 생산한 후 조립하면 소총의 품질도 올라가고 고장이 나더라도 그 자리에서 수리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라이 휘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아이디어가 번뜩여서 호환성 부품이라는 생각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민간 엔지니어들의 힘만으로 휘트니의 아이디어가 실현된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일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미국 전쟁부였다. 18세기 말 프랑스와의 전쟁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미국 전쟁부는 빠르고 안정적으로 총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조면기 사업으로 빚에 시달리던 휘트니는 바로 이 요구에 부응하면서 막대한 금액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휘트니는 이 돈으로 생산의 기계화를 시도했지만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품질의 제품을 납품하지 못하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 이후에도 스프링필드 병기창을 통해 총기 생산의 기계화에 막대한 투자를 하며 총기 제작자들에게 좀 더 효율적인 무기 생산 방식을 찾을 것을 주문했다.
미국 정부가 새로운 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자, 많은 기술자와 사업가들이 몰려들어 생산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은 시계, 재봉틀 등 다양한 산업으로까지 확장되며 경제 자체를 탈바꿈시킨다. 소위 ‘아메리칸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미국식 생산 체계가 만들어져 포드주의의 기초가 놓인 것이다. 새로운 생산 체계를 만든 것은 역동적인 시장의 개개인들이 아니었다. 그 밑에는 실패의 리스크를 감내하는 정부의 지속적인 투자가 있었다.
(/ pp.60~65)

혁신은 차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늘날 최고의 경제적 화두는 단연 혁신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경제가 다시 활기를 찾기 위한 실마리로 혁신을 꼽는다. 오늘날 바로 그 혁신을 대표하는 기업은 애플,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등인데,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미국 기업이다. 미국은 어떻게 최첨단 기술을 전면에 내세우며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업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할 때 종종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의 대립구도가 등장한다. 이 구도에 따르면 유럽은 사회안전망과 기초 과학에 정부가 투자를 많이 하는 공공 부문 중심의 경제라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역동성이 떨어진다. 반면 미국은 민간 부문이 중심이 되어 첨단 기술에 활발하게 투자를 하는 경제이기에 역동적인 혁신들이 나타난다. 실리콘밸리의 작은 차고에서 열심히 일하는 스티브 잡스의 이미지가 이 생각을 대표한다.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모두 작은 차고에서 시작되었던 탓에 우리는 혁신이 정부와는 무관한 민간 영역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정부 중심의 투자와 프로젝트를 지양하고, 민간 영역의 자금 흐름이 원활해지도록 돕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모두가 잊고 있는 아이젠하워 시대를 조명함으로써 경제를 발전시키는 진정한 혁신은 정부가 여러 첨단 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때 일어났음을 일깨워준다. 물론 스티브 잡스에게 자유롭게 활동할 만한 공간과 여건이 없었다면 아이폰 같은 제품들은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폰의 혁신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아이폰을 구성하는 컴퓨터, 반도체, 인터넷 기술 모두가 정부 지원의 산물이었음을 잊게 된다.
아이젠하워 시대에 정부는 구소련에 군사 기술이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종 첨단 기술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이를테면 미국은 구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자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 즉 DARPA를 통해 각종 기술 개발에 투자했다. 국방과 관계없는 낭비라는 비판에도 개의치 않았다. 다양한 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결과 탄생한 것이 패킷교환이었고, 이것이 훗날 인터넷의 기초가 된다. 패킷교환의 핵심 소프트웨어 프로토콜 TCP/IP를 개발한 빈트 서프와 로버트 칸 역시 이 DARPA 관련 인사였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기술들에 투자했던 것은 월가의 엔젤 투자자가 아니라 정부였다. 혁신을 이룩해낸 엔지니어들도 차고의 젊은이들이 아니라 정부 프로그램이나 그 하청을 받은 대기업 출신이었다. 기업은 개발된 기술을 발전시켜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기여했다. 혁신은 새로운 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정부와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는 기업가와 엔지니어가 시너지를 발휘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 pp.142~151)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는 실용의 리더십
미국이 이런 경제 정책들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이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념보다는 현재의 상황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경제 정책을 실행해 나갔다. 해밀턴은 물론이고 진보주의자로 꼽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케인스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보수주의자라 평가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그랬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을 박차고 나와 진보당을 설립한 탓에 미국 진보주의의 기수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민주당 후보를 위험한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일 만큼 강경한 보수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후에 그는 자신의 보수적 이념에 매몰되지 않았다. 미국의 성장을 가로막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보적인 의제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해 트러스트들을 해체하고 사회적인 불평등을 완화하는 일에 기꺼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가 하면, 심지어 공화당을 탈당해 진보당을 만들어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방해하기까지 했다.(본문 91~96쪽)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더했다. 우리는 뉴딜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가라앉은 수요를 되살리는 케인스주의의 원조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전통적인 경제학이 제안하는 바에 급격하게 어긋날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위기 상황이 되자 특정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따르기보다 문제 해결의 방법을 모색했다. 여러 실험적인 경제 정책을 펴고 그중에서 결과가 좋은 것을 택해 규모를 확장했다. 그는 경기가 좋아지자 긴축 정책을 폈다가도, 그로 인해 다시 경기가 침체되자 빠르게 다시 돈을 풀었다.(본문 101~108쪽)
보수주의자로 꼽히는 아이젠하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민주당 남부 진영과 공화당 내부로부터 세금을 줄이고 각종 정부 사업을 축소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세율을 내리지 않았고,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했다. 세율의 인하가 소수의 기업가들과 정치인들에게만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이젠하워 시대는 성장의 과실이 시민들에게 고루 분배되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pp.113~118)

이것이 미국적인 실용주의의 모습이다. 이념이나 경제 이론과 관계없이 지금 필요하고 가능한 일들에 집중하는 것, 바로 그 실용의 리더십이 미국의 위기 극복과 경제 성장의 근본적인 힘이었다.

금융화, 그 쓰라린 실패의 교훈
이 책이 미국을 조명하는 이유는 단순히 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했던 사례들로 가득하기 때문이 아니다. 결정적인 실패의 사례에도 주목한다. 바로 1970년대 이후 금융을 중심으로 경제를 재편하는 작업이다. 이 사례는 경제 개혁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은 왜 1970년대에 여러 산업 중에 하필 금융으로 옮겨 갔을까? 그 과정은 기존의 경제 재편과는 확연히 달랐다. 1970년대 이후 일어난 경제 재편은 명확한 비전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경제 공간을 창출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존에 있던 규제와 통제들을 하나씩 벗겨나가는 해체의 과정에 가까웠다. 새로운 시장은 그러한 해체가 축적된 결과였다.
시작은 항공산업과 운송산업의 탈규제였다. 경쟁을 제한하여 안정성을 확보하는 대신 높은 가격으로 기업들의 이윤을 보장해주던 규제들이 풀리는 것을 소비자들은 환영했다. 이 두 산업의 규제 해체가 인기몰이를 하자 탈규제는 하나의 열풍이 되어버렸다. 정치권은 눈에 불을 켜고 규제를 더 풀 수 있는 영역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금융과 각종 거래 중개 사업이 선택되었다. 그렇게 대공황의 악몽이 서서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 pp.213~226)

게다가 탈규제 열풍은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수리적인 금융공학의 뒷받침을 받았다. 학계에서는 밀턴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시장의 힘에 경제 전반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이 강고해졌다. 또한 수학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리스크를 정교하게 계산하는 기술이 등장하면서 금융의 규제를 풀어도 금융 위기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금융시장 행위자들이 리스크를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으니 다양한 파생상품들을 자유롭게 거래하도록 할 때 자본이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공급된다는 주장이 힘을 받은 것이다. 이 생각은 앨런 그린스펀과 로버트 루빈 등의 관료와 정치인들을 통해 실제 경제 정책에도 반영되기 시작한다.
(/ pp.227~230)

미국이 금융화의 길을 갔던 과정은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해나갔던 과정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 경제 개혁에는 규제를 풀면 모두가 그 혜택을 볼 것이라는 모호한 구호만 있었을 뿐, 경제가 어떤 모습이 될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비전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변화를 주도한 힘은 현재 미국 경제에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실용주의적 자세가 아니었다. 하나의 경제 이론을 굳게 믿고 그것을 밀고 나가는 이데올로기적 자세였다. 모든 것이 기존의 미국 경제 재편과 반대였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 제조업은 붕괴했고 불평등은 심화되어 사회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며 경제가 침체에 빠져 결국에는 2008년 금융 위기로 이어졌다. 반면 금융에서의 혁신이 남긴 실질적인 혜택은 별로 없었다.

어떻게 다시 성장할 것인가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래를 개척하는 형태로 경제 발전을 이루지 않았다. 다른 선진국들이 만들어 놓은 첨단 산업들을 빠르게 따라잡는 ‘추격형’ 경제 발전 전략을 구사했다. 미국의 의도적인 방조와 동아시아 국가들의 적절한 정책 구사 덕분에 비교적 최근까지 동아시아 국가들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의 발전국가 모델은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일본, 중국 모두 저성장을 마주하면서 어떻게 성장해야 할지를 다시 고민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그런 점에서 가장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미국은 새로운 생산 체제와 첨단 기술들을 발명하여 미래를 개척해가는 형태의 경제 발전을 했고, 그 길에서 벗어나 처절한 실패의 경험도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성공적인 경제 개혁은 단 한 번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성공에는 늘 보이지 않는 손의 팔꿈치를 들어 올려 적절한 위치로 옮겨주는 정부가 있었다. 경제 발전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임무이기에 기업과 시장에 그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앞으로의 미래를 고민하고, 그것을 헤쳐나갈 방법을 고심하고 토론하는 수준 높은 정치가와 시민의 역할이 다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는 그 정치적 토론이 얕은 경제 이론과 이데올로기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말해준다. 성공적인 경제 개혁은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만큼 명확한 비전과 그 비전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들을 모색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경제 구호를 내세우기보다는 생산성 증가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미국이 걸었던 이 길을 잊지 않는다면 현재의 불황을 극복하고 우리의 경제와 사회 전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소개
스티븐 S. 코언(Stehpen S. Cohen)
런던정치경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도시 및 지역계획과 명예교수로 있다. 백악관, 의회경제협의회 등 미국 내 여러 정부기관 및 경제 단체들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편, 그 밖에 여러 나라와 국제기구의 경제 자문역을 지냈다. 『제조업은 여전히 중요하다: 포스트 산업 경제의 신화 Manufacturing Matters: The Myth of the Post Industrial Economy』, 『영향력의 종말: 다른 나라들이 돈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The End of Influence: What Happens When Other Countries Have the Money』 등의 저술에 참여했으며, 주로 미국 경제의 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J. 브래드퍼드 들롱(J. Bradford DeLong)
하버드대 경제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3~1995년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부 부차관보를 지냈다. 거시경제학 교과서를 비롯하여 여러 학술서를 집필했으며, 최근에는 『영향력의 종말: 다른 나라들이 돈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함께 저술했다. 주 연구 분야는 거시경제 정책 및 경제 발전이며, 특히 경제사 연구로 이름이 높다.
목차
머리말
서론: 우리는 무엇을 잊었는가
- 미국은 어떻게 경제 대국이 되었는가
- 미국은 왜 경제 위기를 맞게 되었는가

1장 자립 경제의 설계: 알렉산더 해밀턴
- 작은 정부, 자유시장의 신화
- 공화주의적 농업국가 vs 상업적 공업국가
- 제조업국가로의 전환
- 해밀턴적 시스템의 유산

2장 도약과 위기: 링컨에서 루스벨트까지
- 자유로운 시장의 형성: 링컨과 공화당
- 사회경제 문제 해결: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진보주의 운동
- 경제 위기 극복: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3장 경제 강국의 자기혁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아메리칸 드림: 삶의 풍경
- 아메리칸 드림의 보호: 군사력
- 끝없는 개척: 과학과 기술
- 아이젠하워 시대의 결실: 디지털 시대의 개막

4장 동아시아의 추격: 일본과 중국
- 추격형 발전 전략
- 비극과 희극의 경제학
-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의 탄생: 일본
- 발전국가의 실용주의적 변용: 중국
- 발전국가 모델의 한계: 불균형

5장 몰락의 시작: 금융화
- 미국 금융산업의 성장
- 금융화의 세 가지 원인
- 비대한 금융 문제
- 탈규제 열풍
- 본격적인 금융화
- 희미해진 대공황의 기억

결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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