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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이 알려주는 것들

야마모리 도루 지음은혜 옮김삼인

15,000원

책 소개
복지국가의 이념과 현실

사실 국가가 사람들의 생계를 보장한다는 사고방식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예컨대 고대의 율령국가는 신민에게 경작지를 배분함으로써 생계를 꾸려나가게 했다. 다른 한편 곤궁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선 형태의 구제활동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국가 차원에서 빈곤에 대한 대응으로서 현금을 지급한 것은 약 200년 전부터 있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탄생한 때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빈곤자 중 고령자나 장애인 등은 ‘구제받아 마땅한 빈민’이었다. 이에 반해 노동할 수 있는 빈곤자(워킹푸어)는 ‘구제받을 필요가 없는 빈민’이며 위험하다고 간주해서 구빈원이라 불리는 수용시설에 격리해 거기서 그들의 ‘나태’한 심성을 바로잡고 노동규율을 심어주고자 했다. 또한 이들은 일반시민보다 열등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겨졌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고 했을 때, 문제는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로 영양실조에 걸린 노동자의 참상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일부 위험한 계급의 극빈이 아니라 일반대중의 빈곤이 ‘발견’된 것이다. ‘사회문제’로서의 빈곤의 발견은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 등 여러 정책으로 반영되었지만 소득보장의 틀 자체가 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영국은 독일 같은 전쟁국가(warfare)가 아니라 복지국가(welfare)를 목표로 천명했는데, 전후의 새로운 소득보장 시스템은 영어권을 중심으로 복지국가라 일컬었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이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완전고용의 달성(개인에게 의미하는 바는 ‘일자리는 찾으면 얼마든지 있으며 취직을 하면 먹고살 수 있다’이다)을 전제로 한다.
2. 일시적인 리스크에는 개인이 보험료를 납부하는 사회보험으로 대응한다.
3. 미흡한 부분에서는 공적부조(公的扶助)를 안전망으로서 시행한다.
그러나 복지국가 이념의 세 가지 기둥 중 첫 번째 기둥인 완전고용이 많은 나라에서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노동복지(workfare)’ 또는 ‘복지에서 노동으로’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복지국가 이념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지원을 하면서 소득보장형 복지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완전고용이 되지 않는 사회에서 생활보호는 안전망으로서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를 비판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가사노동에 임금을!-사회운동 속의 기본소득

1968년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빈자들의 행진’을 계획했으나 행진 직전에 암살을 당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그가 인종차별에 반대했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보장소득(기본소득) 정책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킹 목사는 비혼모들의 운동에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녀들은 그 운동을 통해 육아?돌봄 등 가사노동에 대한 ‘생활임금’으로서의 보장소득을 요구했다. 당시는 가사를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임금노동뿐만 아니라 가사 등 부불노동(不拂勞動)을 통해서도 지탱되고 있다는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변혁의 물결이 휩쓸던 유럽에서 이탈리아도 대규모의 파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중 파도바의 여성들이 전개한 ‘여성들의 투쟁’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을!’이라는 요구를 내걸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노동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모든 사람에게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의 주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영국에서는 장애인, 환자, 실업자, 비혼부모, 노령연금 수급자, 공적부조 수급자 등이 복지서비스를 수급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청구인조합을 결성해서 기본소득을 요구하게 되었다. 특히 조합의 비혼모들은 복지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동거규칙(동거하는 남성이 있으면 급부를 중지함)’에 따라 사생활을 감시당하는 모욕까지 받으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라는 슬로건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이 슬로건은 성역할 분업을 고착화하기도 하고 실제 집안일을 하는지 여부를 심사해야 한다는 논의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감시를 낳을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녀들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 아니라 기본소득을’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렇게 미국,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는 1970년을 전후로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운동이 있었으며 그 운동의 담지자 중 다수는 여성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금전적으로나 사회자원에 있어서나 힘든 상황에 내몰린 여성을 포함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당국의 탄압을 받는 경우도 있어서,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하향세에 접어들어 여성들이 기본소득을 요구했다는 사실조차 사회에서 잊혀갔다.

사상사 속의 기본소득

200여 년 전 처음으로 토머스 페인과 토머스 스펜스에 의해 ‘권리로서의 복지’라는 사고방식이 제출되었을 때, 이는 기본소득적인 제안이었다. 이 기본소득의 근거 중 끊임없이 언급되어온 것은, 원래 공동의 소유였던 토지나 과거의 문화적 유산에서 얻은 결실을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제프 샤를리에 등은 지배적인 노동관에 대항하는 대안적 노동관을 제시하면서 기본소득론을 논의했다. 복지국가가 구상되던 당시, 케인스와 미드 같은 경제학자들은 기본소득형 모델의 이론적 우위성을 인정했다.
경제학자들은 기존의 복지국가 시스템에 빈곤의 덫 등 (임금)노동유인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노동유인을 더욱더 높여가면서 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로서 마이너스 소득세 등 기본소득형 정책이 경제학자들에 의해 대안으로 주장되었다.
기술혁신 등으로 인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량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고용을 전제로 한 기존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고 일부 경제학자들은 주장해왔다. 필요노동량이 감소하는 사회에 더 알맞은 소득보장 시스템으로서 기본소득이 논의되어왔다.

기본소득에 대한 우려의 시선

* 인간이 일을 안 하게 되지 않을까
현재 세계의 구조는 굶어 죽는 것에 대한 공포를 부채질하여 사람들을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흔히 일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일에 대한 강제와 압박이 사라지면 인간은 자발적으로 창의적인 일을 찾아서 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젊은이의 창업률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무척 낮다. 많은 젊은이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공시족이 되고 있다. 사회의 안전망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실패가 치명적인 까닭이다. 이런 사회의 미래가 낙관적일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산업구조의 변화 등으로 완전고용이 더더욱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장시간 노동이 줄어들면서 일자리를 나누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3D업종에선 이때야말로 시장의 수요공급의 원리가 나설 차례이다. 일하는 조건이 그대로라면 하려고 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임금이 오를 것이다. 3D업종 임금이 대학교수의 급료보다 높아질지도 모른다. ‘어려운’ 일과 ‘더러운’ 일의 경우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일을 어렵지 않게 만드는 기술혁신에 투자를 하고, ‘위험한’ 일의 경우 위험도를 낮추는 연구를 시행하는 등의 작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 부자들에게도 돈을 주어야 하나
부자를 서비스에서 배제하려면 선별 비용도 추가로 들고, 일부만이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수치심(낙인)이 생길 수 있다. 부자라도 공립초등학교에 갈 수 있고 공립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고 지자체의 쓰레기수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본소득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제도는 좋은 제도가 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 현행 제도에서도 중?고소득층 역시 세액공제 등의 형태로 국가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

* 재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이 돈이 드는 이야기를 할 때 항상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거를 하거나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데도 모두 돈이 들지만 유독 복지급부와 기본소득 등에 대해서만 재원 문제를 따지고 드는 경향이 있다. 보통선거제를 시행하는 데도 공교육 제도를 실시하는 데도 예산이 필요하지만 재원 문제를 핑계로 이런 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제도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지면, 다른 예산을 조정하거나 증세를 하거나 기채(起債)를 해서 그에 알맞은 재원을 조달하면 된다는 말이다.

* 기본소득, 상상이 아닌 상식이 되는 사회
1968년 전후의 시기에 분출되었던 요구 중 대다수는 적어도 우리의 관념으로는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성평등과 인종평등이 그렇다. 양질의 노동환경에 대한 권리도 그렇다. 이러한 가운데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은 아직은 머리로도 상식이 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기본소득에 대해 논의하는 학자, 정치인, 시민 네트워크는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기본소득 개념은 정교해지는 동시에 그 다양성도 유지되고 있다. 기본소득을 실험해보는 나라나 지방자치단체도 생겨났다. 우리나라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에 가입하여 2016년 제16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기본소득 서울선언’에서는 19세기 노예제 폐지, 20세기 보통선거권 쟁취에 버금가는 21세기 인류의 세계사적 과제로 기본소득 쟁취를 든 바 있다.
저자소개
야마모리 도루
1970년 일본 가나가와 출생. 교토대 대학원 경제학 연구과 수료. 도쿄대, 케임브리지대 등을 거쳐 도시샤대 경제학부 교원. 전공은 사회정책. 공저로 『경제학과 젠더』, 『복지국가의 변모』, 『포스트 자유주의』, 『아마르티아 센의 세계』 등이 있다. 기본소득에 관해서는 국제학술지 『Basic Income Studies』의 편집위원을 역임한 것 외에, 다치바나키 도시아키와의 공저 『빈곤을 구제하는 것은 사회보장개혁인가 기본소득인가』가 있다.
목차
1장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 복지국가의 이념과 현실
1-1 기본소득의 개요/1-2 복지국가의 구조/1-3 일본의 현실/1-4 노동복지와 기본소득

2장 가사노동에 임금을! ― 여성들의 기본소득
2-1 미국의 복지권 운동/2-2 이탈리아의 ‘여성들의 투쟁’과 아우토노미아 운동/2-3 영국의 청구인조합 운동

3장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노동이다 ― 현대사상 속의 기본소득
3-1 달라 코스타의 독특한 해석/3-2 안토니오 네그리의 논리/3-3 ‘푸른잔디모임’ ― 일본의 장애인 운동

간주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 철학자들의 기본소득

4장 토지나 과거의 유산은 누구의 것인가 ― 역사 속의 기본소득
4-1 ‘야만스러운 다중’의 자연권/4-2 시장경제의 성립과 기본소득 구상안 출현의 동시성/4-3 푸리에주의와 J. S. 밀/4-4 길드사회주의와 사회신용운동/4-5 케인스, 미드, 복지국가

5장 인간은 일을 안 하게 될까? ― 경제학에서의 기본소득
5-1 기본소득은 노동유인을 떨어뜨리는가?/5-2 기술혁신과 희소한 노동/5-3 누가 무임승차자인가/5-4 급부형 세액공제 ― 현실화된 부분적 기본소득?/5-5 기본소득과 세제

제6장 남반구, 녹색, 불안정성 ― 기본소득운동의 현재
6-1 기본소득 지구네트워크와 남반구/6-2 녹색의 기본소득/6-3 복지권 운동 그 이후와 프레카리아트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