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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의 역사에서 잊힌 여성들…2차대전 `암호전쟁 영웅` 이었다
코드걸스 / 리자 먼디 지음 /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펴냄 / 2만7000원
기사입력 2019.10.18 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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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암호 해독 부서. 구성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사진 제공 = 미국 국가안보국]
제2차 세계대전은 사상 최대 규모의 `암호 전쟁`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이 공습당한 날, 미국이 받은 가장 큰 충격은 어떻게 지도자들이 일본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했냐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20년 동안 군비 축소와 고립주의 정책을 지속해왔다. 첩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에 외국에서 활동하는 변변한 첩자 하나 없었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든 이상, 적의 통신 시스템을 마비시키려면 최상의 암호 해독 조직이 필요했다. 타국의 외교관, 정치 지도자, 독일 잠수함 함장, 태평양 섬들의 감시병, 심지어 기업과 은행까지 전 세계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미국은 모든 내용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암호 해독자를 모집하는 비밀편지들이 미국 전역으로 보내지기 시작했다. 웰즐리대 4학년으로 독일어를 전공한 앤 화이트는 1941년 11월 문제의 편지를 받았다. 수학 전공자인 엘리자베스 콜비, 식물학 전공자인 낸 웨스트콧도 같은 편지를 받았다. 이 학교에서만 20여 명의 십자말풀이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비밀 회합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브린모어대, 바너드칼리지, 래드클리프칼리지 등에도 같은 편지가 도착했다. 세븐 시스터즈(아이비리그가 남학생만 입학을 허가하는 것에 맞서 설립된 7개 명문대학)의 여학생들은 전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 암호 해독 분야에서 일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받았다. 애인, 가족 누구에게도 업무 내용을 말하지 말라는 비밀 엄수 서약을 하고 이들은 해군 인력 담당관에게 모집돼 암호 해독 훈련을 시작했다.

국가에 의해 그 존재가 숨겨진 여성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를 최초로 세상 밖으로 꺼낸 책이 나왔다. 펜대만 굴리던 여자들이 일본 배를 어떻게 침몰시켰는지 생생하게 기록한 이 책의 저자는 리자 먼디. 워싱턴포스트 전속작가 출신인 저널리스트로 `미셸 오바마의 담대한 꿈`을 쓴 작가다. 그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먼지 쌓인 수백 상자 분량의 기록 수집물을 분석해 이 책을 썼다. 침몰한 선박들 명단, 적군에서 탈취한 암호 책자 등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고 생존해 있는 여성 20여 명과도 인터뷰를 했다.

선발된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문제와 알파벳 글자가 인쇄된 종잇조각이 담긴 봉투를 숙제로 받았다. 룸메이트에게도 숨긴 채 숙제를 풀어 제출했고, 통신 교육 강좌처럼 해독 훈련을 받았다. 경로 환치, 암호 알파벳, 다중문자 치환 암호 같은 용어를 공부하고, 글자를 감추는 비즈네르 암호 기법도 마스터했다. 학생들은 1942년부터는 해군 본부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자리가 없어 일부는 휴지통을 엎어 놓고 일해야 할 정도로 인원이 많았다. 직무를 숨기기 위해 허드렛일을 한다고 답하느라 비서로 취급받기도 했다. 암호 해독을 하는 여성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남자 형제, 애인, 친구가 있었다. 자신의 형제가 탄 배와 부대의 운명이 기록된 암호문을 해독하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괴롭힌 건 여성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여성은 재능을 비약적으로 쓰는 일보다 지루한 일을 더 잘한다는 편견이 있었고, 이로 인해 암호 해독에 더 적합할 것이라는 선입견 아래에서 일했다. 앨런 튜링과 같은 암호 해독의 천재에 관한 전설은 과장된 이야기에 가깝다. 암호 해독은 실제로 고독하지 않았고 거대한 협업의 산물이었다. 전체 팀원이 잡동사니 수집가처럼 숫자를 머리에 저장하고 동료의 작업을 보며 수집한 조각들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중요한 자산은 기억력이었고, 소음 속에서 신호를 포착하는 직관적 도약을 한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여성이었다.

저자는 암호 해독 군단의 세대적 특성에도 주목한다. 1942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은 4%에 불과했다. 이들은 여성 참정권이 주어진 1920년도에 태어나 어릴 적에 대공황을 겪었다. 가정은 흔들렸고 아버지는 전후 외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명문대 여성 수천 명이 비밀편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성에게는 건축가나 엔지니어의 기회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여성의 지성을 원하는 곳이 생기자 이들은 앞다퉈 달려갔다.

암호 해독 군단의 전적은 대단했다. 태평양 섬에 처절한 육해공 합동 공격을 가할 때, 연합군이 일본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암호 해독이었다. 대서양에서 나치 잠수함을 완전히 제거한 것도 카를 되니츠 독일 해군 제독이 U보트 함장에게 지시를 내리는 데 사용한 나치의 에니그마 암호를 미국와 영국이 풀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이도 암호 해독자들이었다. 연합군과 반대로 추축국은 여성 인력을 많이 동원하지 않았다. 반면 1945년 미군에서 활약한 암호 해독 조직 약 2만명 중 1만1000명이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조직이 극비로 운영된 탓에 이들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고, 종전 이후에야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 책의 성과는 암호 해독자로 청춘을 보낸 여성들의 목소리와 삶의 궤적을 구체적으로 되살려냈다는 점이다. 저자는 승전의 역사에서 이들의 기여가 너무 쉽게 간과됐음을 비판한다. 이 조직에서 일한 많은 여성이 수뇌부로 기용되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난 뒤 책을 집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쉽게 잊혀졌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스티븐 체임벌린 소장을 비롯한 많은 이가 암호 해독 군단의 공로를 치하했다. 하지만 누구의 연설에서도 암호 해독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언급된 적이 없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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