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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대전쟁의 전야
기사입력 2020.01.23 15:01:02  |  최종수정 2020.01.23 15: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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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
[고구려사 명장면-88] 당 태종은 고구려 정복의 욕망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던 듯하다. 다만 대외 형세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그 뜻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640년 5월에 서역의 고창(高昌)국을 정복하고, 641년에 새 강자로 흥기하던 설연타(薛延陀)마저 대파해 서역 일대를 안정시켜 후환을 덜은 이후에 고구려 원정의 뜻을 굳힌 듯하다. 이는 641년 7월에 고구려에 진대덕(陳大德)을 사절로 보낸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진대덕은 640년 2월에 고구려 태자 환권이 외교사절로 온 것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파견됐는데, 진대덕의 직무를 보면 단순히 외교사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진대덕은 병부 소속인 종5품 직방낭중(職方郎中) 자리에 있었는데, 직방낭중의 직무는 국내외 군사 등 정보를 얻어 지도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이런 직무를 수행하는 인물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것은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할 때 필요한 여러 지리 정보 등을 얻기 위한 것이었음은 따져볼 필요도 없다.

실제로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온 뒤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자신은 경승지를 좋아한다면서 가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어, 산천이나 성곽, 교통로 등에 대해 세세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대덕은 8월에 당으로 돌아가서는 수집한 정보를 당 태종에게 보고했고, 당 태종은 보고 내용에 대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진대덕은 이때 수집한 정보를 묶어 `고려기(高麗記)`라는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한원(翰苑)`이라는 책에 옹공예(雍公叡)가 주석을 붙였는데 여기에 고려기에서 인용한 기사 13개 조가 있어, 이를 통해 어떤 내용의 책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전하는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 중요 지역의 지리와 지형, 교통로, 기후와 특산물 등이었다. 현재 전해지는 기사 중 남소성, 평곽성(건안성), 국내성, 마다산 등이 당시 진대덕의 사행 길과 무관한 지역이었음을 고려하면, 이때 진대덕이 고구려 내부 정세에 대해 광범위하게 정보를 수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 관리들은 과연 진대덕이 중요한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몰랐을까? 수와 격전을 치른 경험이 있고, 더욱이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당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고구려의 견고한 방어태세를 보여줌으로써 당으로 하여금 침공의 뜻을 접게 하려는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이는 진대덕이 평양에 도착하자 영류왕이 군대를 위엄 있게 도열해 사신을 맞았다는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고구려 군사력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후에도 당이 고구려에 보내는 사신의 임무 중 하나는 고구려 내부 정세에 대한 파악이었을 것이다. 당 태종이 641년 진대덕 파견부터 전쟁 직전인 644년까지 4년 동안 다섯 차례나 사신을 고구려에 보냈다. 이는 당 초기부터 640년까지 18년 동안 사신 파견이 네 차례에 불과했음과 비교하면 매우 빈도가 높다. 이전보다 양국 사이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의 사신 파견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물론 고구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640년에 세자 환권이 당에 사절로 갔으며,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후 643년과 644년에 당에 도사의 파견을 요청하거나 화평을 바라는 사신을 파견했다. 아마 고구려로서도 당의 내부 정세나 전쟁 발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양국 모두 당시 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 직전에 마지막으로 고구려에 갔던 사신인 장엄(蔣儼)을 연개소문은 돌려보내지 않고 6년간 억류했다. 당 태종 역시 644년 9월에 연개소문이 보낸 백금과 숙위병 50여 명을 대동한 사신을 힐책하면서 감금한 사실이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당은 전쟁을 개시하기 이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고구려에 대한 정보 수집에 주력했다. 644년 7월에 영주도독 장검(張儉)으로 하여금 번병들을 이끌고 요동으로 먼저 진격해 교통로 등 여러 형세를 정탐하도록 했다. 그런데 장검에게 보고가 없자 다시 이도종(李道宗)이 자청해 별도로 요동 정세를 정탐하기도 했다. 태종은 장검이 무능하다고 생각해 소환했는데, 이때 장검은 요하 유역 일대의 지리와 정세를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다시 태종에게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장검이 도독으로 있었던 영주도독부는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는 최전방 지역으로서 당연히 고구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입수한 곳도 영주도독부였다. 645년 전쟁 개시 전에는 연개소문이 요동에 온다는 첩보를 입수해 장검이 연개소문과 맞서기 위해 신성으로 출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연개소문이 나타나지 않자 목표를 건안성으로 바꾸기도 했다.

또 당 태종은 수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관료들에게 의견을 듣기도 했다. 645년 당 원정에서 당군의 군량 수송 책임을 맡은 위정(韋挺)은 수 왕조 때 영주총관을 지낸 위충(韋沖)의 아들로 아버지가 고구려 원정의 경험을 기록한 유문을 태종에게 보고해 태종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또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정천숙(鄭天璹, 정원숙)은 644년 11월에 당 태종에게 고구려 정벌이 어려운 이유로 거리가 멀어 군량 수송에 어려움이 있고, 또 고구려가 성곽을 잘 지켜 공격하기 어려움을 직언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 태종은 수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고구려와의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당 태종의 이러한 치밀한 준비 과정은 국내의 적지 않은 반대 의견을 설득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기도 했다. 사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실패는 중국에 고구려 원정에 대해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일종의 사회적 트라우마로 작용한 듯하다. 고구려 원정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대다수 관료의 생각이었다.

태종은 서역 정벌이 끝난 이후 고구려 원정에 대한 자신의 뜻을 넌지시 신하들에게 드러냈는데, 그때마다 대체로 아직 군사를 움직일 때가 아니라거나, 고구려가 더 자만해지기를 기다리자는 등 신중론이 우세했다. 고구려 원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644년 2월에 상리현장이 고구려를 다녀와서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당의 요구를 연개소문이 거절했다고 보고한 뒤부터였다. 이때 당 태종은 최종적으로 고구려 원정을 결심한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신하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상리현장의 보고 직후 어전회의에서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략하는 데 직접 나서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이에 간의대부 저수량(褚遂良)은 신중론을 폈고, 병부상서 이적(李勣)은 태종의 전쟁 의지를 적극 지지했다. 태종이 고구려 원정으로 마음을 굳히자, 이를 바꾸기 힘들다고 판단한 신하들은 태종의 친정(親征), 즉 직접 고구려 원정에 나서는 것을 만류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664년 10월, 마침내 당 태종은 고구려와 전쟁을 선포했다. 태종은 국정을 태자에게 맡기고 낙양으로 옮겨 전쟁 준비를 독려했다. 이미 7월에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 3주에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영주도독 장검에게 요동을 공략해 형세를 살펴보라고 명령했으니, 사실상 전쟁 준비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태종의 전쟁 선포는 민심을 달래려는 절차였을 뿐이다.

태종은 장안(長安)에서 낙양으로 떠나기 전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말하기를 "요동은 예전에 중국 땅이었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근심할 것 없다"고 안심시켰다.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하고 결국 왕조마저 무너져버린 것을 지켜본 어두운 기억은 당의 조정 신료들과 일반 백성을 두렵게 했다. 당 태종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철저하게 전쟁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수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아마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막북을 제압해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황제천가한`으로 숭배되고, 서역마저 내 앞에 무릎 꿇린 영웅이 아닌가? 저 동방의 한 줌도 안 되는 고구려와 패륜아 연개소문이 어찌 나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당 태종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는지 몰라도, 고구려가 어떤 나라인지, 고구려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수양제만큼 여전히 몰랐던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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